[07/26] 마틴 루터의 생애와 신학사상6
Update: 2015-07-26
Description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완결편
1522년 비텐베르크로 귀환한 루터는 4년 여간 개신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즉 칼 슈타트와 결별하고 농민전쟁을 반대하는 등 점진적이며 온건함으로 표현되는 루터 자신의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1524년과 이듬해에 걸쳐 루터는 당대 대 인문학자이자 개혁지향자인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사람’이었는데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선하며 타고 난 선한 씨앗을 교육을 통해 발아시켜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인간은 철저히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칭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므로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루터를 지지하던 인문주의자들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의 위기상황
1525년에 이르렀을 때 95개조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동료 개혁가 또는 지지자들이 다수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지지 세력은 지식인과 농민 그리고 개혁의 동료 등이었으나 이들 안에서 분열과 갈등이 점차 자라가며 증폭되었습니다. 게다가 중세 가톨릭교회는 모든 개혁세력을 ‘루터파’로 규정하고 가톨릭 세력 자체 동맹을 통해 보름스칙령의 시행을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칫 사멸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의 극복과 루터교회의 탄생
이 때 헤센지역의 영주 필립이 루터를 지지하는 정치, 군사적 동맹을 주창하였고 루터의 활동 지역인 작센의 영주가 합세하는 등 1526년 토르가우 동맹을 결성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즉 가톨릭 세력인 황제의 힘에 대항하는 영주들의 동맹으로 개신교 탄생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인데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보름스 칙령을 보류하기로 결정하면서 개신교가 실체로 등장하였고 이것이 독일개신교 즉 루터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세력과의 관련 속에서 태어난 개신교는 루터를 지지하는 영주의 힘에 의해 실체화되었으므로 영주에 의해 교회 시스템이 가동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세속 당국이 독일 루터교의 예배 순서까지 관리하고 감독하는 특징을 지닌 배경입니다. 즉 교회의 수장이 중세교회의 수장인 교황에서 지역 영주로 이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당시 새로운 교회의 시스템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안이 제출되었는데 목회자 청빙과 대의적 의결 기구, 네트워킹 등을 특징으로 하는 1안과 중앙감독의 지시에 의해 교회가 작동되는 감독제의 2안이었는데 루터는 2안을 선택하여 오늘까지 루터교는 감독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안의 모습은 오늘날 장로교회를 통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양 교회 체제의 확정
개신교인 루터교가 실체화된 1526년부터 30여 년간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는 대립구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영주들의 정치적 세력 다툼도 종교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톨릭세력은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어 보름스 칙령의 시행을 추진했는데 이에 반발한 14개 도시의 대표와 귀족 400여명이 반기를 들고 항의서를 제출하여 루터를 지지합니다. 이 ‘항의서’에서 비롯된 이름이 오늘날까지 개신교를 일컫는 용어인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이 때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터키의 침공을 막아내었으며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힘을 키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5세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세력의 통합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루터교를 인정하려는 의도를 담아 신앙고백서 제출을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 루터가 아닌 멜란히톤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는데 그는 가톨릭과의 조화를 위해 연옥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츠빙글리 등 여타 개혁세력과는 선을 긋는 내용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루터교의 신앙고백서가 되었고 루터교는 이 신앙고백서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에 불만을 품은 군주들이 이탈하여 두 세력의 타협은 무산되었고 이탈한 군주들은 1531년 작센과 헤센 경계지역인 슈말칼덴에서 군사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에는 점차 참여 세력이 늘어나 외국 세력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95개 조항을 적은 대자보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마침내 유럽 전체의 정치 구도를 변화시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고 1546년 마침내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 황제와 지역영주연합 그리고 가톨릭세력과 루터교 세력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종교개혁의 주창자 루터는 그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55년 황제 카알5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1530년 작성된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평화협정을 맺어 두 종교 지역을 분할하였는데 한 지역 한 종교 방식을 유지하되 지역 영주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뜻을 이어 실체화된 개신교인 루터교는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위에서 새로운 교회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522년 비텐베르크로 귀환한 루터는 4년 여간 개신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즉 칼 슈타트와 결별하고 농민전쟁을 반대하는 등 점진적이며 온건함으로 표현되는 루터 자신의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1524년과 이듬해에 걸쳐 루터는 당대 대 인문학자이자 개혁지향자인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사람’이었는데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선하며 타고 난 선한 씨앗을 교육을 통해 발아시켜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인간은 철저히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칭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므로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루터를 지지하던 인문주의자들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의 위기상황
1525년에 이르렀을 때 95개조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동료 개혁가 또는 지지자들이 다수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지지 세력은 지식인과 농민 그리고 개혁의 동료 등이었으나 이들 안에서 분열과 갈등이 점차 자라가며 증폭되었습니다. 게다가 중세 가톨릭교회는 모든 개혁세력을 ‘루터파’로 규정하고 가톨릭 세력 자체 동맹을 통해 보름스칙령의 시행을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칫 사멸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의 극복과 루터교회의 탄생
이 때 헤센지역의 영주 필립이 루터를 지지하는 정치, 군사적 동맹을 주창하였고 루터의 활동 지역인 작센의 영주가 합세하는 등 1526년 토르가우 동맹을 결성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즉 가톨릭 세력인 황제의 힘에 대항하는 영주들의 동맹으로 개신교 탄생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인데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보름스 칙령을 보류하기로 결정하면서 개신교가 실체로 등장하였고 이것이 독일개신교 즉 루터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세력과의 관련 속에서 태어난 개신교는 루터를 지지하는 영주의 힘에 의해 실체화되었으므로 영주에 의해 교회 시스템이 가동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세속 당국이 독일 루터교의 예배 순서까지 관리하고 감독하는 특징을 지닌 배경입니다. 즉 교회의 수장이 중세교회의 수장인 교황에서 지역 영주로 이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당시 새로운 교회의 시스템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안이 제출되었는데 목회자 청빙과 대의적 의결 기구, 네트워킹 등을 특징으로 하는 1안과 중앙감독의 지시에 의해 교회가 작동되는 감독제의 2안이었는데 루터는 2안을 선택하여 오늘까지 루터교는 감독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안의 모습은 오늘날 장로교회를 통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양 교회 체제의 확정
개신교인 루터교가 실체화된 1526년부터 30여 년간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는 대립구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영주들의 정치적 세력 다툼도 종교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톨릭세력은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어 보름스 칙령의 시행을 추진했는데 이에 반발한 14개 도시의 대표와 귀족 400여명이 반기를 들고 항의서를 제출하여 루터를 지지합니다. 이 ‘항의서’에서 비롯된 이름이 오늘날까지 개신교를 일컫는 용어인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이 때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터키의 침공을 막아내었으며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힘을 키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5세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세력의 통합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루터교를 인정하려는 의도를 담아 신앙고백서 제출을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 루터가 아닌 멜란히톤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는데 그는 가톨릭과의 조화를 위해 연옥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츠빙글리 등 여타 개혁세력과는 선을 긋는 내용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루터교의 신앙고백서가 되었고 루터교는 이 신앙고백서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에 불만을 품은 군주들이 이탈하여 두 세력의 타협은 무산되었고 이탈한 군주들은 1531년 작센과 헤센 경계지역인 슈말칼덴에서 군사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에는 점차 참여 세력이 늘어나 외국 세력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95개 조항을 적은 대자보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마침내 유럽 전체의 정치 구도를 변화시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고 1546년 마침내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 황제와 지역영주연합 그리고 가톨릭세력과 루터교 세력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종교개혁의 주창자 루터는 그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55년 황제 카알5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1530년 작성된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평화협정을 맺어 두 종교 지역을 분할하였는데 한 지역 한 종교 방식을 유지하되 지역 영주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뜻을 이어 실체화된 개신교인 루터교는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위에서 새로운 교회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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